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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대구/일상다반사

혼자하는 겨울산행, 욕심을 버리는 시간

라이프대구 2010.03.19 08:12
폭설이 회색빛 콘크리트 숲을 뒤덮고 며칠이 지난 후 오랜만에 햇빛이 내리쬐던 날, 불현듯 산을 오르고 싶은 충동에 비슬산을 향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도착한 시내버스를 타고, 구부러진 길과 강변을 지나기를 또 한참...그렇게 한시간넘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비슬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천년고찰, 유가사.

유가사


폭설이 내린지 며칠이 지난 뒤라 눈이 없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쌀쌀했던 날씨탓인지 흙을 뒤덮고 있는 눈을 보니 산을 오르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앞서 눈을 밟을 수 있다는 즐거움에 한껏 기분이 좋아집니다.

가슴이 시릴 정도의 큰 숨을 내쉰 뒤 걸음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욕심들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해야하는 것, 바라는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머리속을 어지럽힙니다. 잊으려 산을 찾았건만 이상하게도 잊으려 했던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걷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 탓인지 오히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웁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한가지씩 이것저것 바라는 것들이 쉴새없이 떠오릅니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걸음은 느려지고, 숨은 가파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습니다.

등산로를 덮은 눈때문에 발을 옮기기가 더욱 힘이 듭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중턱즈음에 이르러 한숨을 돌립니다. 목을 축이고, 다시금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이상하게도 좀 전까지 머리를 어지럽히던 바람들 대부분이 생각나질 않습니다. 무엇에라도 얻어맞은냥 머리가 텅비어 버립니다. 어쩌면 거칠게 내뱉는 숨을 따라 욕심들도 함께 내뱉어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렇게 한참을 걷습니다.

비슬산 대견봉


걷고 또 걷기를 두시간, 후끈거리는 열기가 온몸을 감싸안을 즈음 드디어 정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매서운 바람에 나뭇가지를 따라 얼어붙은 눈과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정상에 서서 두팔을 벌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아봅니다.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다 눈을 뜨고, 배고픔을 달랩니다.

정상에 오르면 모든 것을 떨쳐버릴 수 있으리란 기대와는 달리 바람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이것저것 구체적이었던 바람들이 몇가지로 줄어들었을 뿐입니다. 등산로 한켠에 산을 찾는 이들이 하나둘 쌓아올린 돌탑을 보니 사람은 모두 바람을 떨쳐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무게를 잴 수 없는 눈꽃처럼 욕심이 가벼워질 뿐이라는 생각에 이릅니다.



걷습니다. 한시간이 지났을 즈음 경사면을 뒤덮은 억새풀을 마주하게 됩니다. 봄이면 분홍빛으로 물들일 참꽃들이 차가운 공기를 피해 움크리고 있습니다.

최정산 참꽃군락지


정상 바로 밑, 깍아지른 절벽위에 천년전 누군가의 바람을 간직한 채 남겨져 있는 옛 절터와 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바람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세워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왠지모르게 욕심을 버리지 못해 자책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대견사지 삼층석탑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옵니다. 한시간여를 걸어 이른 곳에서 오랜 세월과 함께 조각조각을 이룬 바위 덩어리들을 마주합니다.

비슬산 암괴류


거대한 산과 같던 바위 덩어리가 시간과 함께 흩어져버리고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산을 오르며 머리를 어지럽혔던 욕심들도 흩어져 버렸음을 떠올리며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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