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로 한복판에 5년째 불이 꺼진 건물이 있습니다. 한때 "대백 앞에서 보자"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82년을 이어 온 향토기업 대구백화점이 이제 창업주 일가의 손을 떠납니다. 2026년 7월 16일 나온 최대주주 변경 공시가 그 신호였습니다.
이번 대구백화점 매각을 "백화점이 팔렸다"로만 읽으면 절반만 본 셈입니다. 사겠다고 나선 쪽은 유통 회사가 아닙니다. 건설·부동산에 강한 자본입니다. 넘어가는 것도 매장이라기보다, 동성로 노른자 부지를 쥔 경영권입니다.
계약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구정모 회장과 특수관계인 6인이 보유한 보통주 279만5,743주, 지분율로 25.82%를 세경인베스트와 아람코리아에 넘깁니다. 값은 주당 8,000원, 모두 합쳐 223억6,594만 원입니다. 매각 발표 전날 종가가 5,540원이었으니 40%가 넘는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은 셈입니다.
문제는 돈이 들어오는 속도입니다. 지금까지 치러진 계약금은 10억 원, 전체의 4.47%뿐입니다. 통상 M&A에서 계약금을 10% 안팎으로 잡는 관행에 비하면 눈에 띄게 얇습니다. 1차 중도금 14억 원과 2차 중도금 80억 원을 거쳐, 잔금 119억여 원은 임시주주총회 하루 전날 들어옵니다. 거래 종결은 8월 25일, 임시주총은 이튿날 26일로 잡혀 있습니다.
얇은 계약금은 그대로 이행 리스크가 됩니다. 매수자가 중간에 발을 빼도 잃을 돈이 적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는 이미 한 번 데었습니다. 잔금이 통장에 찍히기 전까지, 이 거래를 마침표라 부르기는 이릅니다.

대백의 뿌리는 깊습니다. 시작은 1944년, 창업주 구본흥이 문을 연 '대구상회'였습니다. 1969년 지금의 동성로 자리에 10층 규모의 대형 백화점을 세우며 대구 상권의 중심으로 올라섭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본점 앞은 시민들의 약속 장소였습니다. 1993년에는 대봉동에 대백프라자를 열어 고급 백화점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기울기 시작한 건 대기업이 들어오면서입니다. 2003년 롯데, 2011년 현대, 2016년 신세계가 차례로 대구에 매장을 냈습니다. 향토 백화점 한 곳이 감당하기 벅찬 무게였습니다. 적자가 쌓였고, 끝내 경영권을 내려놓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지금 대백은 전국에 남은 사실상 유일한 향토 백화점입니다.
나이를 세는 방식부터 갈립니다. 대구상회를 기준으로 잡으면 82년, 주식회사 대구백화점으로 전환한 1969년을 기준으로 잡으면 57년입니다. 같은 회사인데 매체마다 숫자가 다른 까닭입니다.
본점은 2021년 7월 1일 무기한 휴점에 들어갔습니다. 이름은 휴점이었지만 사실상 폐점이었습니다. 대구 최대 상권의 심장이 멈추자 주변 유동인구가 빠졌고, 동성로 전체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매각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2022년 1월, 대백은 부동산개발업체 JHB홀딩스와 본점 건물·부지를 2,125억 원에 넘기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금리가 뛰고 부동산 PF 시장이 얼어붙었습니다. JHB홀딩스는 10월 31일 최종 기한까지 잔금 2,075억 원을 채우지 못했고, 대백은 계약금 50억 원을 몰취하며 계약을 깼습니다. 이후 사기 고소와 무고 맞고소로 번졌고, 2023년 4월 경찰은 구정모 회장에게 혐의가 없다며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뒤로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023년 차바이오그룹과의 협상은 결렬됐습니다. 2024년 8월에는 삼정KPMG를 주관사로 세워 본점과 신천동 아울렛, 신서동 물류센터를 묶어 공개매각에 부쳤지만, 시장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 시기 | 매각 시도 | 규모·결과 |
|---|---|---|
| 2021.7 | 본점 무기한 휴점 | 사실상 폐점, 동성로 공동화 |
| 2022.1 | JHB홀딩스 자산양수도 계약 | 2,125억 원, 10월 잔금 미납으로 무산·계약금 50억 몰취 |
| 2023 | 차바이오그룹 인수 협상 | 결렬 |
| 2024.8 | 삼정KPMG 공개매각(본점·아울렛·물류센터) | 표류 |
| 2026.7 | 세경인베스트·아람코리아 SPA | 지분 25.82%, 223억6,594만 원 |
| 자료: 대구백화점 공시 및 언론 보도 종합, 2021~2026 | ||
다섯 해 동안 매수 후보가 몇 차례 바뀌는 사이에도, 본점의 불은 다시 켜지지 않았습니다.
새 주인이 건설·부동산 자본이라는 점에서, 이번엔 다르리라는 기대가 나옵니다. 세경인베스트는 건설·부동산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그룹과 얽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건물만 사는 대신, 경영권을 쥐고 개발로 우회하는 길을 택한 셈입니다. 다만 "이번엔 뚫린다"고 단정하기엔 걸림돌이 세 겹입니다.
첫째는 돈의 방향입니다. 이번 거래는 회사가 아니라 기존 주주의 주식을 사고파는 구주 거래입니다. 223억 원은 구정모 회장 일가에게 흘러가고, 회사에는 최근 1년 만기로 갈아탄 891억 원의 차입금이 그대로 남습니다. 본점과 신서동 자산은 그 빚의 담보로 잡혀 있습니다. 새 자본이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회사 곳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규제입니다. JHB홀딩스가 오피스텔 개발안을 접었던 이유도 용적률이었습니다. 상업지역의 주거용 용적률을 400%로 묶는 대구시 조례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 조례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셋째는 경합입니다. 대구 중구는 노후 청사를 옮기면서 본점 자리를 신청사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민간 초고층 개발과 공공 복합청사가 같은 부지를 두고 저울에 오른 상태입니다.
여기에 대구 부동산 경기 자체가 얼어 있습니다. 개발의 열쇠는 새 주인의 의지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용적률을 쥔 대구시, 청사를 저울질하는 중구청, 그리고 시장 상황이 함께 맞물려야 문이 열립니다. 결정권의 상당 부분이 매수자 바깥에 있다는 뜻입니다.
지역 여론은 기대와 우려로 갈립니다. 5년간 도심을 비워 둔 건물이 새 모습으로 바뀐다면, 동성로 상권을 되살릴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건설 경기와 일자리에 거는 기대도 여기서 나옵니다.
반대편에는 '먹튀' 논란이 있습니다. 소액주주와 노동계 일부는, 경영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할 오너 일가가 223억 원을 손에 쥐고 떠나는 그림을 도덕적 해이로 봅니다. 구주 거래라는 구조가 이 비판에 힘을 싣습니다. 매각 대금이 회사가 아니라 개인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영업 중인 대백프라자 직원들의 고용 승계도 불투명합니다. 새 주인이 유통업을 이어 갈지가 분명하지 않은 탓입니다.
8월 26일 임시주총이 끝나면 대구백화점 매각의 새 주인이 공식 확정됩니다.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번에 들어온 자본은 동성로에 불을 다시 켤까요, 아니면 먹튀 논란만 남긴 채 또 한 번의 표류로 이어질까요. 그 답의 윤곽은 잔금이 치러지는 8월 마지막 주에 드러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