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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촌놈, 서울광장에서 긴 밤을 지새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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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촌놈'이 요즘 부쩍 서울을 찾는 일이 많아 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있는 행사와 모임이 주로 서울에서 열리다보니 어쩔 수 없네요.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이 열린 5월 29일에도 국제 방송음향조명기기 전시회(KOBA)와 벤처소비자 서포터즈 모임이 있어 서울을 방문했는데, 왠지 모르게 발길이 계속 서울광장을 향하게 되더군요.

KOBA를 대충 둘러보고 서울광장으로 이동했는데, 아직은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는 이른 오후임에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서울광장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선 자유발언이 계속되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 음료수를 나눠주고 쓰레기를 치우는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대한문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추모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떨어진 도로에서는 경찰들과 시민들이 대치를 하고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낮

(서울광장, 2009.5.29, 촬영: 소니 핸디캠 HDR-CX7)

한참을 앉지도 않고 서성이다 저녁이 되어 벤처소비자 서포터즈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그냥 대구로 돌아오려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다시 서울광장으로 향했습니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오히려 낮보다 더 많은 분들이 서울광장에 자리하고 계시더군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서울의 밤

(서울광장, 2009.5.29, 촬영: 소니 핸디캠 HDR-CX7)

낮에는 위태로움 속에서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밤이되자 더 많은 분들이 서울광장에 자리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잠이 든 사람들과 금새라도 쓰러질 듯 고개를 떨군채 축늘어져 자는 사람들, 누굴 향해서인지 고함을 치는 사람들, 싸울 듯이 서로에게 고성을 지르는 사람들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분노를 삭이기위해 술을 마신 탓이겠지만, 가족과 함께 서울광장을 찾은 어린 아이들과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커다란 봉투를 들고 다니며 쓰레기를 담는 여학생들, 연신 비질을 하느라 분주하신 어르신, 그리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보니 제가 괜히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분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계신 탓인지 불만을 표하기보다는 맨바닥에 쓰러진 분들께는 자신들이 가져온 자리를 양보하고, 싸움을 말리고, 다독여주시더군요.

서울광장을 둘러보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그렇게 계속해서 걷다보니 마지막 대구행 기차시간마저 지나버렸더군요.

지친 다리도 풀 겸 나눠준 신문지를 깔고 앉아 멍하니 타들어가는 촛불만 바라보았습니다. 기다랗던 초가 반정도 줄어들 때까지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다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는 다시 또 서울광장과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분향소에는 줄어들긴 했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한켠에서는 초를 나눠주고, 꺼진 촛불에 다시 불을 붙이느라 분주한 사람들과 봉하마을에 붙일 편지를 쓰는 사람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늦은 시간까지도 계속 쓰레기를 치우는 여학생들까지...그날따라 서늘한 밤공기마저도 그들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평소 상당히 냉소적인 저로서는 대체 무슨 이유로, 무슨 힘으로 저리도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노를 술로 달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에 취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서울광장에서 발걸음을 떼지못한 것도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새벽 4시가 훌쩍 넘었을 즈음, '절망'인지 '희망'인지 모를 그것을 뒤로 한채 서울역을 향해 걸었습니다. 서울광장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서울광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 일상속 새벽 거리의 풍경 그대로의 모습만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새벽기차를 타고 대구에 돌아와보니 30일 새벽 5시 40분경에 경찰들의 진압이 시작되어 심지어는 대한문 분향소마처 철거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에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어있던터라 경찰의 강제해산이 이뤄질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분향소마저 철거를 했다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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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찰의 도를 넘어선 강제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영정만 남은 대한문 분향소를 지키고 있고, 조문의 발길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