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강창역 부근에 멋드러진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이 있다길래 찾아가봤습니다. 그런데, 세찬 겨울바람에 황토빛의 잎들은 거의 다 떨어져 사라져버렸더군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다 이왕 멀리까지 찾아 온 김에 금호강 풍경이나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강창교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강창교위에서 세찬 강바람을 맞으며 금호강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 대나무숲 사이로 얼핏 기와지붕이 보이는게 아닙니까. 궁금한 마음에 이리저리 헤메다 겨우 찾아갔더니, 아주 자그맣고 오래된 서당이 자리잡고 있더군요.
하지만, 대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는데다 대문과 서당 내부에는 거미줄이 가득하고, 대청아래에는 쓰레기로 보이는 것들이 여기저기 모아져있고, 대문아래에는 빛이 바랜 신문과 우편물이 쌓여있는 모습이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걸로 보이더군요.
단지, 대문 앞에 세워져있는 안내 표지판만이 오래되고 유서깊은 서당(이락서당)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락서당(伊洛書堂)은 조선 정조 22년(1798년)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양 선생을 추모하며 대구, 달성, 칠곡 등 아홉 문중의 유생 31명이 인재 양성과 예학 숭상을 위해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강창을 택하여 방 2칸, 대청 2칸을 누각처럼 지은 곳으로, 이락(伊洛)이란 금호강(伊水)와 낙동강(洛水)이 합쳐지는 강창 지역을 나타내는 이름이면서, 주자의 이락연원록에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한데, 이락(伊洛)은 유학의 중흥지 또는 성리학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한강 정구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에게서 모두 수학한 유일한 인물로, 퇴계의 맥을 잇는 영남학파의 계승자이자 영남 남인의 거두로서 당대 최고의 예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또한 남명의 영향으로 실학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 인물이며, 낙재 서사원은 한강 정구의 제자로 퇴계 학맥을 잇는 석학이었으며, 임란시에는 대구 지역에서 최초로 의병을 규합하여 팔공산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되고 유서깊은 서당임에도 알아보니 안타깝게 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인근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이락서당이 위치한 궁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인데다, 이락서당(伊洛書堂) 16경(景)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주변의 경관이 뛰어난 곳인 만큼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져 많은 분들이 찾아 선조들의 뜻을 기리는 곳이 되길 바래봅니다.
이락서당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강창교 위에서 본 이락서당 부근 경관
(오른편 대나무 숲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이시나요?)
좀 더 다가가 봤지만, 울창한 대나무 숲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강창교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보니 주택사이로 기와지붕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계단을 내려가 걷다보니 주택 사이로 난 아주 작은 샛길이 보입니다.
샛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보니 멀리 기와집이 보입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
대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습니다.
대문앞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만이 오래된 기와집이 유서깊은 이락서당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담넘어로 보이는 이락서당 모습
대문앞에는 거미줄이 가득합니다.
대청아래 여기저기 쓰레기가 보입니다.
지붕 기와사이로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대문아래 빛바랜 신문과 우편물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누군가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게 아닌가 싶지만, 폐가가 되어버린 듯 을씨년스러운 모습에는 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