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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시작은 대구였다: 삼성상회부터 제일모직까지

블로그 라이프

2026. 7. 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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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반도체로 세계를 누비는 삼성의 첫 간판은 서울도 수원도 아닌 대구에 걸렸습니다. 1938년, 국수와 청과를 팔던 작은 상회가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삼성의 대구 시절을 되짚으면 한 도시와 대기업이 함께 자라고 또 멀어진 과정이 보입니다.

국수 가게에서 시작된 재계 1위

창업주 이병철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업 기반으로는 물자가 모이던 상업 도시 대구를 골랐습니다. 1938년 3월, 대구 중구 인교동에 삼성상회 간판이 올랐습니다. 지하 1층에 지상 4층,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자본금은 3만 원. 흔히 '단돈 3만 원'으로 소개되지만, 지금 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합니다. 맨손에 가까운 구멍가게라기보다, 당대 기준으로는 제법 밑천을 갖춘 출발이었던 셈입니다.

 

주력은 대구 능금과 동해 건어물을 모아 만주와 중국으로 넘기는 무역이었습니다. 여기에 1층 제면기에서 뽑아낸 별표국수를 더했습니다. 이 별표국수 상표가 훗날 삼성 로고의 뿌리로 이야기됩니다. 유통으로 자본을 쌓고 직접 물건을 만들어 본 경험은, 이후 설탕과 모직으로 사업을 넓히는 밑돌이 됐습니다.

 

삼성 로고의 뿌리가 된 별표국수
삼성 로고의 뿌리가 된 별표국수

제일모직, 섬유도시 대구를 만든 손

삼성과 대구의 인연은 삼성상회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지나간 1954년 9월, 이병철은 대구 북구 침산동에 제일모직을 세웠습니다. 입을 옷조차 수입에 기대던 시절이었습니다.

 

제일모직이 만든 골덴텍스는 국내 첫 국산 양복지였습니다. 한때 국내 양복지 시장의 70%를 차지했습니다. 공장은 대구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안겼고, 대구가 '섬유 패션의 도시'로 불리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지역민에게 제일모직은 회사 이상이었습니다. 보릿고개를 함께 넘긴 살림의 버팀목에 가까웠습니다. 그 자부심이 삼성이라는 이름을 향한 애착으로 오래 남았습니다.

시기 대구에서 삼성의 자취
1938년 중구 인교동에 삼성상회 개업, 청과·건어물 수출과 별표국수 생산
1954년 북구 침산동에 제일모직 설립,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 생산
1982년 대구·경북 연고로 삼성 라이온즈 창단
현재 옛 제일모직 터의 대구삼성창조캠퍼스,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자료: 대구역사문화대전, 제일모직·삼성 라이온즈 연혁 등 종합, 2026년 정리 기준

 

대구에 새겨진 삼성의 시간은 유통에서 제조로, 다시 문화와 스포츠로 옷을 갈아입어 왔습니다.

가장 큰 자랑이자, 가장 오랜 서운함

문제는 그 시간이 대구에 얼마나 남았느냐입니다. 삼성은 성장하며 핵심 역량과 공장을 수원·기흥·화성·평택 등 수도권으로 옮겼습니다. 제일모직 대구공장도 1996년 구미로 통합되며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 대구에서 삼성의 제조 흔적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뒤 고향을 떠난 큰아들'이라는 서운함이 자주 나옵니다. 다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옛 제일모직 터에는 삼성이 대구시에 기증한 오페라하우스와 창조캠퍼스가 들어섰습니다. 삼성 라이온즈는 여전히 대구를 지키고, 2020년 이건희 회장이 갖고 있던 구단 지분은 대구시에 기부됐습니다.

 

남은 것과 떠난 것을 함께 놓고 보면 결이 분명해집니다. 상징과 문화 자산은 남았고, 양질의 일자리와 제조 기반은 수도권으로 갔습니다. 대구가 아쉬워하는 지점은 바로 이 후자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대구만의 사연이 아닙니다. 창업지에서 자란 대기업이 본사와 연구 기능을 수도권으로 모으는 흐름은 여러 그룹에서 되풀이됐습니다. 대구의 서운함을 한 기업의 의리 문제로만 읽으면 절반만 본 셈입니다. 사람과 투자가 수도권으로 빨려 드는 구조가 그 밑에 깔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