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폐허,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다 글에서 소개해드린 삼덕맨션과 가까운 곳에 센트로팰리스라는 최고 43층, 900여가구가 살고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있습니다. 대구분들이라면 구 대구상고 자리라고 하면 다들 아실만한 장소이죠. 하지만, 고층 아파트 숲 사이에 문화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구 대구상고 자리라는 말만 많이 들었지, 그곳에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은 최근 그 곳을 우연히 지나게 되면서 특이한 모습이 눈에 띄어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쯤되면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으실텐데, 다름아닌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저는 대구상고를 다 허물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줄 알고 있었는데 본관은 그대로 남아 보존되고 있더군요)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겨우 오래된 건물 하나를 가지고 뭘 그리 야단이냐고 타박을 주실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고층 아파트 단지를 만들면서 단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건물 한동을 보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이 건물이 지니는 문화재적 가치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인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본관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에는 높다란 아파트만 보일 뿐입니다)
그럼,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이 무슨 가치가 있길래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을까요? 그것도 최고 43층이나 되는 고층 아파트단지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면서 말이죠.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이 문화재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표식인 본관 앞 안내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이 건물은 1923년 일본인이 대구지역 실업인 양성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대구지역 상업교육의 요람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교사였다. 건물은 서쪽 도로에 인접하여 一자형 서향으로 배치되어 정면 중앙이 현관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평면구성은 정면의 편복도를 두고 건물의 중앙의 주 출입구와 이어지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단위실을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지붕은 환기구가 설치된 모임지붕형의 네모난 석면슬레이트를 마름모꼴로 이었다. 내부는 현관입구 4개의 원주를 세워 복도와 두개의 계단실로 구획하고 있으며, 기둥은 로마네스코식 양식의 기둥을 단순화시킨 형태로 보인다. 건물의 내부는 일부 변경되었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와 내부구조는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근데 뭘 이리 어렵게 적어 놓은 것일까요.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기에 문화재로 지정되고 보존되고 있는지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설명해 두었더라면 좋을텐데, 대충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과 건물 구조가 무언가 특이해 문화재로 지정된게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안내판만이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이 문화재임을 알려줄 뿐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래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보존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지어 일장기를 형상화한 문양이 박혀있는 건물인데다, 개발 지연에 따른 도심 공동화(空洞化)가 심화 될 것을 주장하며 이를 빨리 철거하고 개발하자는 주장과 식민지시대에 지어졌지만 근대 건축물로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기에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양측의 주장을 절충해 대구 지역 상업교육의 요람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건물의 외관 구성 및 형태 등에서 당시의 건축적 상황과 서양건축의 유입과정을 살필 수 있는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원래 시민단체에서는 본관 이외에 강당도 보존하자고 주장을 했으나, 강당의 경우 붕괴가 우려되는 노후 건축물이라 철거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후 문화재 보호를 위해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건물 보존을 조건으로 아파트 건설허가가 났고, 2007년 아파트가 완공되며 아파트 숲 사이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듯한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관은 그대로 둔 채 아파트만 짓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면 센트로펠리스 홈페이지 공사진행 포토앨범을 보시기 바랍니다)
센트로펠리스 공사진행 사진(2004년 8월 29일)
(출처: 센트로펠리스 홈페이지)
구 대구상업학교 본관 동영상
솔직히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라 저 역시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나름 여러 의미를 가진 건물이라 어느 정도 보존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산들이 개발에 떠밀려 점점 사라져만 가는 상황에서 조금은 조화롭지 못한 모습일지라도 이렇게 개발과 보존이 절충되어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인 사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자물쇠가 채워진 텅 빈 건물에 불과할 뿐인데 박물관이나 전시장 등 좀 더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