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첫 영문 완역 주석본은 2025년 10월 미국 하와이대학교 출판부(University of Hawai'i Press)에서 나왔습니다. 590쪽에 각주가 약 2,000개 붙었고, 작업에는 60년이 걸렸습니다.
60년이라는 숫자를 두고 흔히 나오는 설명은 헌신입니다. 실제로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Leiden University) 한국학자 세 사람이 스승에서 제자로 원고를 넘기며 이 일을 끝냈습니다.
출발점은 전쟁터였습니다. 프리츠 포스(Frits Vos)는 1950년 네덜란드 파견부대의 대위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아 한국어 통역을 맡았고, 이듬해 3월에는 대구에 머물면서 유교 관련 서적과 한국 민담집을 사 모았습니다. 완역본의 첫 자료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학문적 인연은 1954년과 1955년 논문에서 확인됩니다. 독일 학술지 《Oriens Extremus》에 실린 'Kim Yusin, Persönlichkeit und Mythos'인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흩어져 있던 김유신 기록을 모아 독일어로 옮긴 작업입니다. 1960년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완역과 각주를 평생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원고는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2000년 별세할 때 프리츠 포스 교수가 남긴 것은 군데군데 빠진 초벌 번역이었고, 수제자 바우데베인 발라번(Boudewijn Walraven)에게 나머지를 마쳐 달라는 유언이 함께 전해졌습니다. 발라번은 곧바로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작업이 다시 시작된 해는 2010년입니다. 고려 시대를 전공한 렘코 브뢰커(Remco Breuker)가 합류하면서 속도가 붙었는데, 두 사람이 각자의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며 원문을 대조하고 각주를 붙이는 데 다시 16년이 들어갔습니다. 결과물은 202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포스 교수가 대구에서 첫 책을 사들인 1951년과 완역본 출간 사이에는 74년이 놓여 있습니다.
| 시점 | 내용 |
|---|---|
| 1950년 | 포스, 네덜란드 파견부대 대위로 첫 방한 |
| 1951년 3월 | 대구 체류, 유교 서적·민담집 구입 |
| 1954~55년 | 김유신 연구 논문 발표 |
| 1960년 | 한국 안식년, 완역 착수 |
| 2000년 | 별세, 초벌 원고와 유언 |
| 2010년 | 브뢰커 합류, 작업 재개 |
| 2025년 10월 | 하와이대 출판부 출간 |
| 2026년 7월 | 국내 언론 보도 |
| 자료: 연합뉴스·YTN 보도(2026년), 하와이대학교 출판부, 레이던대학교 자료 | |
60년이라는 표현은 1960년 착수를 기준으로 셉니다. 어느 쪽으로 세든 한 사람의 경력으로 감당되는 길이는 넘어섭니다. 자료를 모은 사람과 원고를 물려받은 사람과 각주를 단 사람이 각각 다른 세대였다는 뜻인데, 그 계승이 제도의 설계로 이루어졌는지는 따로 봐야 합니다.
지원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1991년 설립 이후 18개국 99개 대학에 156석의 한국 연구 교수직을 설치했고, 한국 관련 강좌를 여는 해외 대학은 1991년 32개국 152개에서 107개국 1,400여 개로 늘었습니다. 세종학당은 2026년 6월 말 기준 89개국 273개소이며, 2025년 한 해 수강생은 23만 9,020명으로 역대 가장 많았습니다.
이번 완역본도 같은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이 책이 실린 하와이대 출판부의 Korean Classics Library 총서는 번역 준비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과 교육부 재원으로 이루어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부 지원 사업의 정산과 평가는 대체로 1년에서 3년 주기로 돌아가고, 그 안에서 확인되는 성과는 강좌 수나 수강생 수처럼 세면 나오는 값입니다. 고전 한 권에 각주 2,000개를 다는 일은 그 주기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성과 숫자 자체에도 확인할 대목이 있습니다. 강좌 개설 대학 1,400여 개라는 값의 근거는 재단이 2016년과 2017년에 한 차례 실시한 일제 설문이며, 재단은 이후 수시로 갱신하고 있으나 현재 운영 현황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안내문에 적어 두었습니다. 열 해 가까이 인용된 숫자입니다. 재단이 2026년 7월에야 별도의 해외대학 한국학 현황조사를 처음 공개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세종학당 숫자도 발표된 값을 이어 붙이면 결이 달라집니다. 2024년 6월에는 88개국 256개소였는데 2025년 6월에는 87개국 252개소였고, 그해에도 11개소가 새로 지정됐습니다. 신규 지정분을 감안하면 그 사이 문을 닫은 곳이 적지 않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새로 여는 곳은 보도자료로 나오고 접는 곳은 따로 발표되지 않습니다.

일본 고전의 영문 완역 시점을 보면 순서가 뒤집힙니다. '고사기'는 1882년, '일본서기'는 1896년에 영역본이 나왔고, '겐지 이야기'는 1925년부터 1933년 사이 영국에서 옮겨졌습니다. 일본의 국제교류기금(国際交流基金)이 문을 연 해는 1972년 10월입니다. 번역이 예산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세 권을 옮긴 사람들은 영국의 외교관과 학자들이었고, 자국 학계의 수요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정부 기금은 그렇게 쌓인 번역 위에 나중에 얹혔습니다. 예산이 생긴 뒤에 고전이 옮겨졌다는 순서로 읽으면 참고할 대목을 놓칩니다.
중국은 방식이 다릅니다. 국가사회과학기금이 운영하는 중화학술외역(中华学术外译) 사업은 번역 대상 도서 목록을 먼저 공개하고 출판사와 연구자가 함께 과제를 신청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별 과제의 예산 규모와 기간은 공개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옮길지 국가가 미리 정해 두고 사람을 찾는 순서라는 점만 분명합니다.
두 사례가 가리키는 지점은 같습니다. 번역을 감당할 사람과 번역할 목록이 먼저 마련돼 있던 곳에서 완역이 빨랐고, 예산의 크기는 그다음 문제였습니다.
완역본이 나온 시점과 국내에 알려진 시점 사이에는 아홉 달이 있습니다. 2025년 10월 출간, 2026년 7월 보도입니다. 그 사이 이 책을 먼저 집어 든 곳은 유럽 한국학계였습니다.
지원 창구가 셋으로 갈려 있는 구조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외교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교육부, 세종학당재단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이며, 세 기관의 사업 목표와 평가 지표는 각각 다른 부처의 기준을 따릅니다. 출간 직후 국내에서 이 책이 크게 다뤄지지 않은 배경을 이 지점에서 짚어 볼 수 있습니다.
해외 한국학 지원을 두고 흔히 나오는 처방은 증액입니다. 다만 이번 완역본의 60년은 다른 조건을 가리킵니다. 자료를 모은 사람과 원고를 물려받은 사람과 각주를 단 사람이 모두 다른 세대였고, 세 사람 모두 이 일이 자기 임기 안에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손을 댔습니다.
다음 고전이 같은 길을 밟는다면 그 시간을 누가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요. 3년 뒤 정산표에 올릴 숫자가 나오지 않는 일에 예산을 붙이려면 평가 기준부터 다시 짜야 하는데, 그 기준을 만들 주체가 어느 부처에 있는지부터 분명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