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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섬유패션산업! 대구는 왜 아직도 섬유 도시로 불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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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섬유 도시라고 부르는 말은 오래됐습니다. 대구정책연구원이 2024년 내놓은 자료에서 대구 섬유패션산업은 지역 제조업 사업체의 16.6%를 차지합니다. 숫자만 보면 건재합니다. 다만 산업이 남아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남고 무엇이 빠져나갔느냐가 문제입니다.

낙동강 전선이 남긴 산업

대구가 직물 산지가 된 출발점에는 기술 우위보다 우연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양잠이 성했고, 1910년대에는 달성동과 비산동 일대에 직물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제사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명주 거래가 늘었습니다. 서문시장의 포목상들은 그 물량을 전국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1950년에 왔습니다. 다른 지역 방직 시설이 전쟁으로 무너지는 동안 낙동강 전선 안쪽의 대구는 설비를 지켰습니다. 전후 복구기에 대구가 최대 직물 공급 기지가 된 배경입니다. 산업의 기반이 경쟁에서 이겨서가 아니라 살아남아서 생긴 셈입니다.

 

1960년대 수출 진흥 정책기에 섬유 제품은 국가 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주력 품목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국산 폴리에스터 원사가 나오면서 대구에 화섬 직물 생산 기반이 굳어졌습니다. 서문시장에서 직물을 떼어 팔던 도매상들이 직접 제조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입니다. 1980년대 대구는 제조업체의 절반가량이 섬유 업종이었고, 종업원의 65% 가까이가 섬유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도시의 산업 구조가 사실상 한 업종에 얹혀 있었습니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기관은 남아

1990년대 들어 인건비가 오르고 중국·동남아시아의 저가 물량이 밀려들자 범용 직물 중심의 생산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정부와 대구광역시가 꺼낸 카드가 밀라노 프로젝트였습니다. 1단계 사업 기간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총사업비 6,800억 원이 들어갔습니다. 국비 3,760억 원, 지방비 515억 원, 민자 2,615억 원으로 짜인 구성이었습니다. 2단계에 1,980억 원, 3단계에 400억 원이 더 투입됐습니다.

 

2005년 감사원은 사전 조사와 타당성 검토가 부실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구역사문화대전은 이 사업이 결국 실패로 귀결됐다고 정리합니다. 평가는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남은 것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집니다.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다이텍연구원, 한국패션산업연구원은 그 시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2026년에도 이 기관들은 지역 기업의 친환경 소재 개발과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때 세운 하드웨어가 지금 전환을 집행하는 손이 된 것입니다. 25년 전과 지금의 처방전에 적힌 문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부가가치, 다품종 소량, 이 두 마디가 반복됩니다.

대구 섬유패션산업, 16.6%의 착시

구분 1980년대 최근 집계
지역 제조업 내 위상 제조업체의 약 절반이 섬유 업종 섬유패션 사업체 비중 16.6%
고용 종업원의 약 65%가 섬유 종사자 종사자 2만 6,397명
부가가치 집계 없음 1조 3,321억 원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80년대 수치), 대구정책연구원 「대구 섬유패션산업 르네상스 전략(안)」 2024년 발표

 

1980년대 대구 제조업 고용의 3분의 2 가까이를 감당하던 섬유 산업은 현재 사업체 비중 16.6%, 종사자 2만 6,397명 규모입니다.

 

16.6%라는 숫자는 흔히 건재의 근거로 인용됩니다. 성질을 따져 보면 다르게 읽힙니다. 사업체 수를 기준으로 삼은 비중은 업체가 잘게 쪼개져 있을수록 커집니다. 전국 섬유산업에서 1인 이상 업체의 약 90%가 종사자 10인 미만이라는 점을 함께 놓으면, 이 비중은 규모가 아니라 파편화의 크기를 재고 있는 편에 가깝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대구의 섬유패션산업 중심성 순위는 서울에 이어 전국 2위였습니다. 순위는 남았습니다. 그런데 노동생산성은 서울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껍데기의 크기와 알맹이의 밀도가 따로 움직인 결과입니다. 현장 지표도 같은 방향입니다. 염색산단 매출은 5,462억 원에서 5,164억 원으로, 검단산단은 7,694억 원에서 7,506억 원으로 각각 줄었습니다.

중국 쉬인도 한 도시에 모여 있어

요즘 위기의 이름으로는 패스트패션이 자주 불립니다. 쉬인(Shein)은 기획부터 양산까지 3주 안에 끝냅니다. 이 속도의 근거를 물류 거리에서 찾으면 대구가 위안을 얻기 쉽습니다. 원사와 제직, 염색, 봉제가 한 권역에 모여 있으니 잠재력은 충분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쉬인의 본거지인 광저우(廣州) 판위구도 똑같이 모여 있습니다. 이 구역에는 의류 회사 5,000여 곳이 밀집해 있고, 본사 주변에만 주요 공급자 400여 곳이 붙어 있습니다. 밀도로 따지면 대구보다 촘촘합니다. 집적은 이미 경쟁자의 기본 조건입니다.

 

속도가 갈리는 자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쉬인은 주문과 재고, 생산 진척을 한 회사가 직접 쥐고 공급망에 개입합니다. 400개 공장이 가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400개가 하나의 주문 흐름으로 묶여서 3주가 나옵니다. 쉬인은 빠르면서 동시에 거대합니다. 속도는 규모의 반대말이 아니라 규모가 조직해 낸 결과에 가깝습니다.

 

대구컬렉션

민첩함을 누가 조립하나

대구가 쌓아 온 자산은 분명합니다. 파리 무대에 한국인 최초로 오른 이영희 디자이너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유족은 8,000여 점이 넘는 의상과 아카이브를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1973년에 데뷔한 최복호 디자이너는 1989년 대구컬렉션을 기획해 국내 최장수 패션 컬렉션을 만들었습니다. 2021년 문을 연 펙스코(FXCO)에는 총사업비 64억 원이 들어갔고, 심사를 거친 신진 브랜드 35개가 들어섰습니다. 시그레이트와 상민 같은 이름이 여기서 판로를 찾았습니다.

 

2024년 전국사업체조사 기준으로 대구의 섬유 관련 사업체 가운데 패션·봉제 분야는 1,132개사, 전체의 27.3%입니다. 재료는 있습니다. 다만 이 재료들을 한 줄의 주문 흐름으로 꿰는 주체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3D 가상 샘플링이든 공유형 제조 플랫폼이든, 기술 도입 자체는 각 업체가 감당할 항목이 아닙니다.

 

결정권이 시청 바깥에 걸린 항목도 적지 않습니다. 지역 업계가 요구하는 염색산업단지의 업종 제한 완화와 노후 기반시설 개선은 대구시 단독으로 매듭짓기 어려운 사안입니다. 산업용 섬유와 친환경 소재로 넘어가려 해도 설비를 놓을 자리와 허가가 먼저 풀려야 합니다. 기술보다 제도가 병목인 구간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1999년에도 처방전에는 다품종 소량과 고부가가치가 적혀 있었습니다. 2026년 자료에도 같은 단어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대구 섬유패션산업의 이번 전환이 앞선 전환과 다른 결과에 닿을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산의 크기일까요, 아니면 흩어진 1,132개 공장을 하나로 묶어 낼 주체의 존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