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안경테를 쓰고 계신다면 그 테는 십중팔구 대구에서 만든 것입니다. 전국 안경 제조업체의 81.5%가 북구 3공단 일대에 모여 있습니다(대구 북구청 기준). 반경 수 킬로미터 안에서 프레스, 용접, 도금, 연마가 모두 끝납니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밀도입니다.
이 것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장인정신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대구 안경산업의 출발점을 따라가 보면, 손기술보다 훨씬 밋밋하고 우연에 가까운 조건들이 먼저 나옵니다. 기술이 도시를 부른 것이 아니라, 도시의 조건이 기술을 붙잡아 둔 쪽에 가깝습니다.
시작은 한 사람의 귀국길이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일본 후쿠이현(福井県)에서 안경테 제조 기술을 익힌 김재수는 형제들과 함께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후쿠이는 지금도 일본 최대의 안경 생산지입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안경 공장들이 군수품 공장으로 바뀌자, 그는 1945년 3월 기계와 원자재를 챙겨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착지는 처음부터 대구가 아니었습니다. 원자재가 떨어져 서울의 셀룰로이드 재생 공장을 찾았지만 그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결국 방향을 튼 곳이 대구였습니다. 1946년 3월 침산동에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가 문을 열었고, 이곳이 국내 근대 안경 제조업의 출발점으로 기록됩니다. 설립 장소를 원대동이나 서구로 적은 자료도 있어 표기가 갈립니다만,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침산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구를 고른 이유는 실용적이었습니다. 안경테는 깎아 놓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도금을 입혀야 제품이 됩니다. 당시 대구에는 도금업을 비롯한 후공정 시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고, 육상교통의 요충지라 원자재와 완제품이 오가기 좋았습니다. 침산동 일대는 개발되지 않은 땅이 넓어 부지를 구하기도 수월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조건 하나가 겹칩니다. 한국전쟁이었습니다. 대구는 전선이 비껴간 몇 안 되는 도시였고, 공장을 잃은 안경업자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미 돌아가고 있던 공장이 자석 역할을 했습니다.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에서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나와 제2, 제3의 공장을 세웠고, 1953년에는 동양셀룰로이드공업사가 문을 열었습니다. 대구가 안경 도시가 된 첫 번째 이유는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안경은 한 공장이 끝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제조 공정이 260개에서 280개로 나뉩니다. 프레스 가공과 용접, 도금, 연마, 사출이 저마다 다른 설비와 숙련도를 요구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큰 공장 하나보다 작은 공장 여럿이 붙어 있는 편이 유리합니다. 부품을 들고 걸어서 오갈 거리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침산동과 원대동 인근에 공장이 촘촘하게 늘어섰고, 그 군집이 오늘의 제3공단이 됐습니다. 같은 현상은 이탈리아 벨루노(Belluno), 일본 후쿠이, 중국 원저우(温州)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세계 4대 안경 생산지가 하나같이 좁은 지역에 뭉쳐 있는 까닭입니다. 산업의 성격이 지리를 결정한 셈입니다.
| 시기 | 사건 | 그때 작동한 조건 |
|---|---|---|
| 1946년 | 침산동에 국제셀룰로이드공업사 설립 | 후쿠이 기술 이전, 도금 인프라, 부지 확보 용이 |
| 1950년대 | 후발 공장 연쇄 설립 | 전쟁 피해를 비껴간 도시로 업자 유입 |
| 1960년 | 홍콩에 3,000달러 규모 안경테 첫 수출 | 경공업 지원·수출주도 정책 |
| 1980년대 | 세계시장 점유율 2위 달성 | 중소기업고유업종 지정, 서울올림픽 내수 성장 |
| 1995년 | 안경테 수출액 2억 5,000만 달러로 정점 | 인건비 상승과 중국산 저가 공세 시작 |
| 2006년 | 대구안경산업특구 지정 | 고부가가치 전환 정책 |
| 자료: 대구역사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매일신문·한국경제 보도, 각 기준 연도 | ||
대구 안경 제조의 분기점은 기술이 바뀐 자리보다 전쟁·정책·환율 같은 바깥 조건이 바뀐 자리에 더 자주 놓여 있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 안경테는 세계시장 점유율 2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성과를 손기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안경산업은 중소기업고유업종으로 지정돼 있었습니다. 대기업이 들어올 수 없는 시장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지정은 2007년까지 유지됐습니다. 여기에 경공업 수출 지원 정책이 얹히면서 소공인 중심 구조가 통째로 보호받았습니다.
보호는 양날이었습니다. 작은 공장들이 살아남았지만, 대규모 연구개발과 브랜드 투자를 감당할 주체는 끝내 자라지 못했습니다. 1995년 2억 5,0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은 안경테 수출은 중국산 저가 공세에 밀려 줄기 시작했고, 2005년에는 세계 점유율이 9위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젠틀몬스터의 사례가 이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초기 제품 제조의 상당 부분이 대구 공장에서 이뤄졌지만, 부가가치는 기획과 브랜딩을 쥔 본사로 흘러갔습니다. 만드는 일과 파는 일의 몫이 다릅니다.
규모를 재는 잣대조차 하나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대구의 안경원 수는 전국 보건소 등록 기준으로 2023년 5월 754곳이었지만,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상권분석 자료에서는 2025년 2월 551곳으로 집계됐습니다. 집계 주체가 다르면 200곳이 갈립니다.
대구는 산업이 흔들린 뒤 제도를 다시 쌓았습니다. 2004년 한국안경산업지원센터가 문을 열었고, 2015년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2006년에는 3공단 일대가 안경산업특구로 지정됐으며, 2009년 안경특화거리가 조성됐습니다. 인력 공급도 이 도시 안에서 돌아갑니다. 대구보건대학교 안경광학과는 1984년 전국 최초로 개설된 학과로, 전국에서 학생이 모여들고 졸업 후 각자 고향에서 안경원을 엽니다.
스마트 글래스는 이 축적을 다시 부르는 시장입니다. 칩셋과 배터리를 얹은 기기를 얼굴 위에 얹으려면 무게 배분과 착용감을 잡아야 하고, 그건 소프트웨어로 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2026년 3월에는 K-아이웨어 글로벌 정책협의회가 출범했고, 중단됐던 K-아이웨어 파크 조성도 다시 논의되고 있습니다.
남은 과제는 그대로입니다. 센서와 통신 칩셋, 소프트웨어 원천기술이 대구 생태계 안에 없습니다. 전파인증 비용도 일반 안경테와는 자릿수가 다릅니다.
1946년의 대구는 도금 공장이 있고 전쟁을 피했기 때문에 안경을 붙잡았습니다. 조건이 먼저였습니다. 그렇다면 대구 안경산업이 다음 세대의 안경까지 붙잡으려면, 지금 이 도시에 무엇이 놓여 있어야 할까요. 손기술은 이미 있습니다. 나머지는 어디서 와야 하는 걸까요.